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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도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본다

사무국, 2014-07-07 10:4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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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도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본다

[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47]

 

 

지난 주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그 대답을 듣고 예수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며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16,13-28 참조).

 

그리고 며칠이 지난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사람 둘을 만나시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알아봅니다. 그런데 이 마귀들은 예수님께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묻고 “쫓아내시려거든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받아들여 “가라” 하십니다(마태 8,28-34 참조).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던 베드로도, 너무나 사나워 사람들이 피해 다니며 무덤에 살던 마귀들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보았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반석이 되고 그 위에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마귀들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 물속에 빠져 죽고 맙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믿고 고백한다는 것이 무엇을 함의하는지 성찰하기 전에 앞의 두 대목이 성경에서 자리한 위치를 살펴봅니다. ‘마귀들과 돼지 떼’(마태 8,28-34)의 내용 앞에는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다’, ‘베드로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다’,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풍랑을 가라앉히시다’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8장은 그런 ‘치유’의 기적을 소개하면서 ‘마귀들과 돼지 떼’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복음사가는 이 모든 일을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마태 8,17)이라고 해설합니다.

 

우리는 반석이 될 수도,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대목(마태 16,13-28)의 앞뒤를 읽어봅시다.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표징을 요구하자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라고 응답하십니다(16,1-4).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가르침)을 조심하라고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16,5-12).

 

그 다음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내용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는데,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베드로의 강한 부정에 대해 예수님께서 “사탄”, “걸림돌”이라는 심한 꾸지람을 하신다는 점입니다(16,21-23). 다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올 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16,24-28).

 

이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을 실현하신 분으로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2. 그분은 인간의 병고와 질병을 짊어지시는 ‘해방’과 ‘구원’의 하느님 아드님이시다.
3.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하며 따르려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
4. 그분은 각자의 행실대로 갚으신다.
5. 그 행실은 반석, 곧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는 토대가 될 수도 있고, 거꾸로 사탄 혹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신앙생활 혹은 믿음의 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도 있고, 냉담한 사람도 있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되면 종교생활을 할 것이고, 그렇다면 교회에 다닐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많습니다.

 

그 믿음의 깊이야 우리 사람이 어떻게 헤아리겠습니까? 믿는다고 고백한다 해서, 혹은 믿지 않는다고 부정한다 해서 그 말이 그 속마음까지 다 담을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또 베드로도 마귀들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알아보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무엇으로 그 ‘알아봄’과 ‘믿음’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앞에 정리한 내용에서 그 기준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병고와 질병을 짊어지는 것’,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 ‘행실’이 그것입니다.

 

십자가 지고 예수님 따르는 길에는
‘사회적 차원의 돌봄’도 포함돼

 

그 기준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적 차원까지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병고와 질병’을 짊어진다는 것의 오늘날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가족이나 이웃이 아프면 지극정성으로 간호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 차원의 돌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그것만으로 ‘돌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경제적인 부담과 의료서비스의 접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회 차원의 돌봄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를 우리 사회는 ‘국민건강보험제도’로 돌보려 합니다.

 

만일 이 사회 차원의 돌봄을 축소시키려면, 혹은 그 돌봄이 턱없이 부족하다면, 혹은 아예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경제적 능력이 한참 모자란 경우 그 가족이 아프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현대사회에서는 지극정성으로 돌보려는 개인적인 노력도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한 사람이 동시에 아픈 가족 돌보는 일과 먹고 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병고와 질병을 짊어지기 위해서’ 사회 차원의 돌봄 장치를 마련하는 일은 ‘믿음’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행실’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차원의 돌봄을 실현하기 위해 내 일처럼 나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가족이 아프지도 않은데 이 ‘사회 차원의 돌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활동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자기 시간을 할애하고, 노력을 기울이며, 활발하게 움직이다 보니 자신의 삶에 불편함이 많을 것입니다. 때로는 그 불편함이 고통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수도 있고, 때로는 범법자까지 될 수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남’을 위해, 그것도 아픈 사람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니, 그를 위해 희생을 감수한 것이니,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를 닮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예만 들었지만, 이와 같은 사회 차원의 ‘행실’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를 ‘인간의 존엄함’의 수호와 증진, 그리고 ‘공동선의 실현’이라고도 하고, 참된 인간화와 참된 사회화라도 하고, ‘세상의 복음화’라고도 하며, ‘복음화의 사회 차원’이라고도 합니다.

 

신앙도 교회도 성숙해져야 합니다. 신앙과 교회의 성숙함이란 ‘자기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를 벗어나 길을 나서며 세상 한가운데서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복음화시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언제나 정화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안 그러면 ‘하느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자기(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최근 이렇게 “자기 내면의 문제와 자기의 관심사”에만 갇혀 있는 것을 두고 “선으로 포장된 끔찍한 타락”이라고 개탄하며, 이를 피하기 위해서 “교회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복음화 사명을 지속하며 사회적 약자를 향한 투신을 계속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복음의 기쁨> 97항 참조).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201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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